유가족이 손수 들고 온 영정들이 놓인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에 다녀왔습니다. 친구와 짬을 내어 간 그곳에는 추모하는 몇몇 시민과 유튜브로 영상을 송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추억이 깃든 케잌샵 앞 이태원 광장은 국화 향기가 가득했습니다. 영정 옆에 하나씩 놓인 핫팩은 아마도 이 추운 날 희생자들의 영혼이 조금이라도 따뜻하길 바라는 마음에 올려둔 것이겠지요.
희생자 대부분이 90년대 후반 청년들이라서 더 황망했습니다. 희생자분들의 이름을 읽다가 이분들과 언제 어디선가 마주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꽃 한 송이를 올려 놓고 나오는데 영정 앞에 놓인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보았습니다. 올해 여름, 진은영 시인이 10년만에 펴낸 신작 시집이었습니다.
분향소를 떠나 초능력 bar에 가서 바이홍을 만나 이태원과 한남동 소상공인들 이야기를 잠깐 듣다가 문득 ‘오래된 거리’와 ‘쓴잔을 마시는 사람’과 ‘슬픔이 유리조각처럼 담긴 컵’을 떠올렸습니다.
‘이태원’과 ‘참사 희생자’와 ‘이태원 소상공인’과 ‘술잔’을 연이어 떠올리다 집으로 돌아와 진은영 시인의 시를 찾아 읽었습니다. 누군가 영정 앞에 고이 올려둔 시인의 시를 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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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 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조각처럼
진은영, <청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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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거리처럼 사랑하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이태원 어딘가에 사랑과 맹세와 시간이 남겨져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다시서점,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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