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세이 문학은 사소설에 그치지 않고 데니스 킨이 말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자기로 가득 채울 뿐”인 유형의 작품을 선호했다."
<책 소개>
비평가 후쿠시마 료타가 지난 헤이세이 연간(1989~2019)의 일본 문학이 마주했던 과제와 그 유산을 결산한 책. 헤이세이는 냉전의 종식, 장기 불황의 시작, 소셜 미디어의 출현 등 일본 안팎에서 사회상의 급변이 일어난 시기다. 이 시기 문학계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 다와다 요코, 무라타 사야카 등이 세계적 인기를 얻은 반면, 국내적으로는 출판 시장이 급속히 위축되고 문학의 위상이 실추되었다.
이 책은 이런 배경 위에서 헤이세이 동안 일본 문학의 현장과 내용에 일어난 근본적 변화를 검토하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작가들로 구성된 헤이세이 문학을 포착하기 위해 여섯 개의 ‘문제군’을 제시한 다음 이들을 ‘나선형 상상력’이라는 하나의 형상으로 엮어 낸다.
급변하는 세계가 만들어 낸 나선형 운동에 끝없이 포획되면서도 이탈을 꾀했던 헤이세이 문학의 유산을 올바르게 상속하고 문학의 진지를 다시 세우려는 비평적 노력이 우리 자신의 과제 또한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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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후쿠시마 료타
1981년 교토시에서 태어났다. 교토 대학교에서 중국 근대 문학을 전공했고 2012년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릿쿄 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4년 메일 매거진 『하조겐론』에 마이조 오타로론을 발표하며 비평 활동을 시작했으며, 2010년 첫 단독 저서인 『신화가 생각한다: 네트워크 사회의 문화론』을 펴냈다. 2013년 출간한 『부흥 문화론: 일본적 창조의 계보』가 2014년 36회 산토리학예상(사상·역사 부문)을, 2016년 출간한 『성가신 유산: 일본 근대 문학과 연극적 상상력』이 2017년 야마나시 문학상을 수상했다. 계속해서 『울트라맨과 전후 서브컬처의 풍경』(2018), 『변경의 사상: 일본과 홍콩에서 생각하다』(2018, 청육만과 공저), 『백 년의 비평: 어떻게 근대를 상속할 것인가』(2019) 등을 펴냈고 2019년 와세다 대학교 쓰보우치 쇼요 대상 장려상을 수상했다. 2020년대 들어서도 『헬로, 유라시아: 21세기 ‘중화’권 정치 사상』(2021), 『책이라는 바이러스: 21세기 사상의 전선』(2022) 등 저술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며 이 시대에 비평이 할 수 있는 역할을 탐구하고 있다.
안지영 (번역)
국문학 연구자. 문학 평론가. 지은 책으로 『천사의 허무주의』, 『틀어막혔던 입에서』, 『근대 문학, 생명을 사유하다』가 있다. 후쿠시마 료타의 『부흥 문화론』을 차은정과 공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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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시작하며 : 헤이세이 문학의 문제군
1장 마이조 오타로와 헤이세이 문학의 내러티브
2장 내향의 계보: 후루이 요시키치에서 다와다 요코까지
3장 ‘정치와 문학’의 재래
4장 사소설 재고: ‘나’를 학습하다
5장 근대의 재발명: 헤이세이 문학과 범죄
6장 소설적 접속: 역사와 허구
종장 민주와 나선
보론 1 당할 이유가 없는 폭력: 교토 애니메이션 방화 사건을 둘러싸고
보론 2 잃어버린 것을 찾아: 무라카미 류의 『미싱』
후기
옮긴이 후기: 다정한 마음을 기리며
부록: 이 책이 다루는 일본 문학서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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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19쪽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문학의 중심적 기능이란 ‘문제군’의 제시라고 보고, 한편 그 문제군을 복원하는 것이 헤이세이 문학을 비평하는 열쇠라고 생각했다. 그 ‘문제’들이 원래부터 작가의 눈앞에 나타나 있던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디까지나 사후적으로 관찰했을 때 뿔뿔이 흩어져서 작업했을 터인 작가들이 특정한 주제에 대한 대응 방식에서 잠정적으로 합류하는 듯이 보인다는 점이다.
86쪽
인류는 기술 발달 속에서 감각이나 체험의 확대를 보다 강하게 추구할 텐데, 그러한 욕망에 활자의 힘으로 맞서기는 용이한 일이 아니다. 문학이 문학에만 가능한 수법으로 싸울 수 있는 전선은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문학이 인간이 가진 성가신 형이상학적 충동에 접속하고 그 힘을 검증할 수 있는 기술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131쪽
헤이세이 문학은 사소설에 그치지 않고 데니스 킨이 말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자기로 가득 채울 뿐”인 유형의 작품을 선호했다. 여기에 공적인 어투에 대한 불신이 더해져 서술자 ‘나’를 사회가 간파할 수 없는 불가해한 미궁으로 만드는 수수께끼 놀이가 나타나곤 했다.
159쪽
세계를 의미의 네트워크, 즉 ‘말’로 재구성하는 수고를 생략하고 뇌나 신체와 직결된 ‘사물’의 집합으로 다루려 하는 것-이러한 즉물적 태도가 지금 할리우드 영화에서 미디어 아트나 유물론적 철학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나타나고 있다.
228쪽
우리가 지닌 인식의 도구는 미덥지 못하고 으레 오류가 따르기 마련이지만, 도리어 그러한 불완전성 덕에 인간은 세계와 언어를 거듭 절충하려는 의지를 얻는다. 소설이란 세계와의 근원적 부적합에서 만들어진 교섭의 기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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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문학이 영광을 잃은 시대
비평가 후쿠시마 료타가 결산한
헤이세이 일본 문학과 그 유산
확장과 수축의 양극적 운동 속에서 길을 잃은 헤이세이 문학
시대의 불안과 마주했던 작품들을 판독기 위에 올리며
경직된 시대를 찢고 빛나는 파괴와 재생이 도래할 가능성을 찾는다
『나선형 상상력: 헤이세이 일본 문학의 문제군』은 『신화가 생각한다: 네트워크 사회의 문화론』, 『부흥 문화론: 일본적 창조의 계보』 등의 저작으로 이름을 알린 비평가 후쿠시마 료타가 헤이세이 시기(1989~2019) 일본 문학이 마주했던 과제를 결산하고 남겨진 유산(혹은 부채)을 이어받고자 집필한 책이다.
헤이세이는 냉전의 종식, 장기 불황의 시작, 소셜 미디어의 출현 등 일본 안팎에서 사회상의 급변이 일어난 시기와 포개진다. 이 시기 일본 문학에서는 세계화의 흐름을 타고서 무라카미 하루키, 다와다 요코, 무라타 사야카 등의 해외 진출이 이루어졌다. 반면 일본 국내로 시선을 돌리면 출판 시장의 급속한 위축과 주도적 문화로서 위상을 잃은 문학의 현재를 발견하게 된다. 이 확장과 수축의 양극적 운동은 문학의 내용과 현장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근대 이후 일본에서 문학은 의심할 여지 없는 지적 전위의 역할을 담당했다. 예컨대 2023년 세상을 떠난 오에 겐자부로는 ‘문학인=보편적 지식인’이라는 등식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헤이세이 시기에 이러한 등식은 빠르게 의미를 잃었고 인터넷의 일반화는 이 경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보편적 지식인의 의무에서 풀려난 작가들은 방향 감각의 혼란을 느끼며 각자 특수한 주제와 결부되는 창작으로 나아갔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아쿠타가와상 같은 이벤트를 제외한다면) 일반 독자와 문학의 거리를 한층 벌려 놓기도 했다.
이 책은 문학의 축소된 사회적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남은 몫이 무엇인지, “문학이 문학에만 가능한 수법으로 싸울 수 있는 전선”을 어디서 찾을지 고민한다. 또 그러기 위해 비평가란 읽고 이해한 결과물로 말한다는 단순한 원칙에 따라 수많은 헤이세이 문학 작품을 독해하고 그것을 고밀도로 압축해 핵심적 이미지를 도출한다.
헤이세이 문학의 ‘나’들을
미궁 속에 가둔 나선형 운동
후쿠시마는 당대 문학에서 일어난 변용을 여섯 개의 ‘문제군’으로 요약하고, 그들을 하나로 묶어 내는 ‘나선형 상상력’의 형상을 제시한다. 문제군이란 각각의 작가가 개별적으로 작업했음에도 현재 시점에서 돌아보았을 때 떠오르는 공통적 문제의식을 뜻한다. 이야기, 내향, 정치, 사소설, 범죄, 역사라는 문제군은 각각 이 책 1~6장의 내용에 대응한다. 헤이세이의 혼란을 반영한 이 문제군들은 문학가의 상상력을 틀 짓는 미궁처럼 작용했는데, 그 속에서 이탈을 시도하지만 실패를 반복하며 나선을 그리는 문학의 운동에 붙여진 이름이 ‘나선형 상상력’이다.
이러한 서술을 통해 후쿠시마는 본래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서 기능했던 문학이라는 매체가 어떻게 그 선명함을 잃었는지, 나아가 레이와라는 신시대의 개막과 함께 빠르게 망각되고 있는 헤이세이 30년이 과연 아무런 유산도 남기지 않았는지 질문한다. 헤이세이에 비평가 경력을 시작한 후쿠시마는 설령 그 유산이 부채의 성격을 띠는 것이더라도 언어와 사고의 전위로서 문학의 역할을 여전히 수행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기꺼이 짊어질 각오가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마이조 오타로와 제로 년대의 열기
문학의 영토를 축소한 소셜 미디어와 동일본 대진재
1981년생인 후쿠시마 료타는 헤이세이 문화 속에서 성장한 세대다. 그는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 문학의 종언』을 출간한 2004년 이종 교배적 작가 마이조 오타로에 대한 평론을 발표하며 비평가 경력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마이조로 대표되는 신진 작가와 독자층이 뿜어내는 아나키적 열량이 기성 문학의 경직성을 찢고 새로운 언어 예술의 가능성을 열어젖힐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고 한다. 잡지 『파우스트』를 거점으로 모인 작가들은 서브컬처의 수법이나 비현실적 폭력성, 성적 페티시즘, 메타 소설적 요소를 과감히 문학에 도입했고 망상에 빠진 서술자를 디스토피아적 세계에 던져넣어 근대 소설의 중심에 자리한 성장이라는 테마를 전복시켰다.
같은 시기 순문학 편에서도 연극계 출신의 오카다 도시키, 마에다 시로 등 1970년대생 ‘로스트 제너레이션’ 작가들을 필두로, 드러눕거나 뒹굴뒹굴하는 서술자를 내세워 기존 문학 언어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웠던 속어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파격이 시도되었다. 불황이 만성화하고 누구나 휴대전화와 인터넷으로 소일하는 사회상에 대한 문학 나름의 응전 전략이었던 셈이다. 후쿠시마에 따르면 베스트셀러가 된 무라타 사야카의 『편의점 인간』(2016)은 이러한 로스트 제너레이션 소설을 계승한 작품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전략을 갱신하려 한 신세대 작가들의 모색은 2010년대 들어 급격히 에너지를 잃었다. 대표적 원인은 소셜 미디어의 대두와 2011년 동일본 대진재의 발생이다. 소셜 미디어는 맹렬한 ‘자기 말하기’의 시대를 모두에게 개방해 ‘타자의 이야기’인 소설의 영토를 단숨에 앗아 갔고, 대진재의 충격과 그 불가해함은 문학적 전복성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한밤의 꿈처럼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이 사그라드는 것을 지켜본 경험과 “축제 분위기에 취해 사태를 꼼꼼하게 언어화하는 데 소홀”했던 자기에 대한 반성이 이 책의 출발점에 있는 셈이다.
‘내향’ 소설가들과 타자의 상실
사소설이 선구한 ‘자기 이야기’의 시대
후쿠시마는 “헤이세이 문학은 1990년대의 공백감과 폐색감에서 출발했다”고 단언한다. 『파우스트』, 로스트 제너레이션 작가들이 문학 형식의 과격한 변형을 통해 시대의 상징적 빈곤을 반영하려 했다면, 그들보다 조금 앞선 세대로서 90년대 일본 순문학의 중심이 된 가와카미 히로미, 다와다 요코, 오가와 요코 등 여성 소설가는 이 책에서 ‘내향’이라는 문제군을 중심으로 독해된다. 바깥 세계에 대한 묘사보다는 주인공의 내부 감각에 대한 페티시즘적 집중 속에서 초월의 가능성을 엿본 이 작가군에 대해, 후쿠시마는 그들이 근대 소설의 전제처럼 여겨지는 리얼리즘과 인간 중심주의를 해체한 것을 성취로서 평가하지만 그 성취가 보다 엄격히 검증되었어야 했다고 짚는다. 이와 관련해 헤이세이 사회의 굴곡(타자성)을 소설 속에 결코 투과시키지 않았던 그들 문학의 한계를 우선 말하고, 인공 환경이 생활 세계를 뒤덮은 시대를 그려 내는 데 ‘내향’이 가지는 가능성 또한 시사하려 한다.
소설은 (독자에 대해) 타자의 이야기이자 서술자가 타자와 관계하며 주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늘 타자성의 문제를 핵심에 갖는다. 내향 소설이 타자와의 관계를 극단적으로 축소해 보이기는 했지만 이런 성격은 일본 문학사에서 명맥을 유지해 온 사소설 장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소설은 시민 사회의 리얼리티와 단절된 ‘나’가 가족적 테두리 안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특징인데, 여기서는 특히 미즈무라 미나에, 아즈마 히로키의 실험적 사소설을 통해 헤이세이의 ‘나’가 봉착한 주체화의 실패를 들여다본다. 나아가 소셜 미디어의 보급이 가져온 ‘자기 이야기’의 팽창과 오토픽션의 유행(‘나’의 중심화), 그 반대 방향에서 대두한 포스트휴머니즘 등(탈중심화)을 언급하면서 ‘나’를 둘러싼 앞으로의 문학적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디스토피아적 충동을 품은 헤이세이 데모크라시
돌아온 정치의 계절은 문학의 활로가 될 것인가
비단 헤이세이 일본만이 아니더라도 오늘날 문학과 언어의 위기를 설명할 때 기술 발달이 가져온 노도와 같은 변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인터넷의 확산은 대중의 발언권을 단숨에 강화하며 문학을 포함하는 기성 미디어의 영역을 극단적으로 축소시킨 한편, 노골적인 욕망과 선동의 언어가 일상부터 정치까지 휩쓰는 사태를 불러왔다. 후쿠시마는 다이쇼(1912~1925) 시대, 물밀듯이 밀려오는 근대화와 함께 민주주의가 확산되는 상황을 ‘다이쇼 데모크라시’라 부른 데 빗대 이 사태를 ‘헤이세이 데모크라시’라 명명한다. 다만 유토피아적 지향으로 채색되었던 다이쇼와 달리 헤이세이 데모크라시는 흉흉한 디스토피아적 충동을 동반한다는 차이가 있다.
20세기 이래 일본 문학은 연호의 변경과 연동하듯 정치화와 탈정치화를 반복했는데, 정치성이 강했던 쇼와 시대 후기에 등장해 일본 현대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로 떠오른 무라카미 하루키는 불확실한 세계에 허무를 느끼고 적당한 거리를 지키려 하는 서술자를 내세워 헤이세이적 탈정치성의 선구자가 되었다. 다만 헤이세이 데모크라시가 접속 과잉 사회로 치닫는 가운데 이러한 거리 지키기의 기술은 효력을 잃어 갔고, 문학의 중심이 되어야 할 자아의 취약성이 점점 더 부각되었다. 그리고 2011년 대진재를 경계로 한 헤이세이 말기, 세계적으로 부상한 정체성 정치와 결합해 자아를 안정시키려는 시도가 일본 문학 내에서 일어나 레이와 문학의 재정치화로 이어지고 있다고 후쿠시마는 평가한다. 더불어 헤이세이 동안 포스트모던 문학과 정치성의 연결 방법을 모색했던 다카하시 겐이치로를 조명하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정치와 문학의 결합이 성마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덧붙인다.
근대 주체의 프로그램으로서 범죄 소설
역사라는 성가신 가시에 응답하기
다시 무라카미 하루키에 관해 말하자면 이 기민한 작가는 헤이세이를 통과하면서도 여러 차례의 변모와 진화를 보였다. 초기 작품들이 그 탈정치성과 탈역사성으로 주목받은 것과 달리 헤이세이 들어 무라카미는 『태엽 감는 새 연대기』 같은 대작을 통해 전쟁의 폭력성을 문학 속에 다시 불러오는 길을 모색하거나 『해변의 카프카』처럼 교양주의적 성장 소설의 형식을 취한 작품을 발표했다.
90년대 일본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대형 범죄 사건의 연쇄는 문학의 상상력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고, 앞서 본 『파우스트』 작가군에서도 그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후쿠시마는 이와 관련해 『해변의 카프카』를 주의 깊게 설계된 범죄 소설로서 독해한다. 그는 근대 문학 속에 면면히 등장한 ‘입법적 탈법자’로서 범죄자 표상을 언급하며, 이 작품이 범죄적 충동에 예민한 소년(탈법자)을 주인공으로 제시한 뒤 그를 에워싸는 교양적 제재들을 촘촘히 배치함으로써 소년이 자기 입법하는 근대적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렸음을 보인다. (‘입법적 탈법자’라는 주제와 관련해 또 한 명의 무라카미인 무라카미 류도 못지않은 중요성으로 함께 다뤄진다.)
또 냉전 종식과 함께 분출한 일본의 전쟁 책임과 역사 인식 문제(재역사화)가 한편으로는 역사 수정주의를 포함하는 탈역사화의 반동을 가져왔음을 지적한 후, 헤이세이 문학이 전반적으로 역사의 문제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던 가운데 『태엽 감는 새 연대기』가 우화적 방식으로 책임 인식에 이르는 길을 내려 도전한 “가치 있는 실패작”이었음도 세심히 짚는다.
여기서 범죄와 역사라는 문제군을 둘러싼 쟁점을 모두 소개할 수는 없지만, 헤이세이 역사가 보여 준 실제 결과가 ‘문학의 패배’를 뜻하더라도 그 패배로부터 승계할 유산을 찾는 데 비평의 역할이 있다는 메시지를 재확인할 수 있다.
헤이세이 문학을 탐사하기 위한 최적의 안내서
여전히 문학이 존재해야 할 이유를 찾는 사람들을 위한 포석
이 책은 지금 일본 문학계에서 가장 영민한 비평가로 꼽히는 인물이 놀라운 지적 성실성으로 그려 낸 헤이세이 문학의 상세한 지형도다. 후쿠시마는 한 인터뷰에서 이 책이 처음부터 외국 독자를 가정해서 쓰인 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만큼 현대 일본 문학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전체 맥락을 파악할 수 있게 하는 데 공을 들였다는 것이다.
90년대 이래 한국에서는 순문학과 엔터테인먼트 문학을 막론한 일본 문학 작품이 다수 번역되었지만 문학 현장 자체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한 비평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의의는 각별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전히 가장 인기 있는 해외 소설가 중 한 명이고 서양에서의 호평을 바탕으로 재조명된 다와다 요코의 작품들도 꾸준히 번역되고 있다. 컬트 작가로 알려진 마이조 오타로도 국내에 마니아층이 존재한다. 이 책은 이런 작가들이 어떤 문학사적, 문화사적 문맥 속에 위치하는지 짚어 준다. 일본 문학과 한국 문학이 맺어 온 밀접한 관계를 고려한다면,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대화를 위해서도 이 책은 탄탄한 논의의 토대가 되어 줄 것이다.
문학이 설 자리를 잃어 가는 현실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문학의 존재 이유 자체가 위태롭게 여겨지는 이 시기에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잃은 황야에서도 문학은 여전히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역설하는 이 책은, 글을 쓰고 읽는 데서 중요한 가치를 찾는 모든 사람에게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을 것이다.
후쿠시마 료타의 또 다른 대표작 『부흥 문화론』 옮긴이 중 한 명이었던 안지영 문학 평론가가 세심한 번역으로 비평 언어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후쿠시마 문체를 살렸고, 권말에는 ‘이 책이 다루는 일본 문학서 목록’을 실어 이 책을 안내서 삼아 헤이세이 문학을 더 탐사해 보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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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 정보>
제목 : 나선형 상상력: 헤이세이 일본 문학의 문제군 (らせん状想像力: 平成デモクラシー文学論)
지은이 : 후쿠시마 료타 (福嶋亮大)
옮긴이 : 안지영
사양 : 문학비평, 일본문학|138×210mm|280쪽|19,000원|리시올
발행일 : 2024년 9월 10일
ISBN : 979-11-90292-28-3 (93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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