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이 책에는 작가의 기억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작가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기억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느새 오늘이 아닌 과거의 어느 한 시점, 그 익숙했던 현실을 향해 조금씩 이끌려 간다. 작가는 아직은 늙었다고 볼 수 없는 나이다. 하지만 각 편에서 그가 산문시로 써 내려간 생생한 기억은 대부분 지나간 시절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의 기억, 그는 이 기억의 조각들을 앞에서부터 뒤로 하나씩 하나씩 정교하게 소환하여 야무진 솜씨로 이어 묶었다. 하나의 기억이 다른 기억을 불러내며 여러 기억이 서로 손에 손을 잡고 그칠 줄 모르는 서사의 춤과 노래를 이룬다. 글을 읽다 보면 저절로 그 리듬을 따라 가게 된다. 각 편은 여러 개의 연으로 이뤄진 시다. 수많은 연이 하나로 모아져 서서히 주제라고 할 수 있는 문양을 형성해 간다. 이 문양은 대개 기쁨과 슬픔을 소박하게 한 줄로 꿰어 놓은 것이다. 작가가 회상하는 삶은 그리 멀지 않지만, 지금과는 매우 달랐던 과거이다. 작가는 옛 기억 속에 담긴 사람들의 인간적이고 소박한 생활의 요소를 꾸준히 응시한다. 발을 단단히 디디고 있는 안내자가 되어 작가는 산과 들을 넘어 마을과 시장을 지나 시골집과 도시의 가난한 셋방으로 우리를 데려다준다. 독자들은 작가를 따라 집밖에 설치한 공동 화장실, 입김이 나오는 추운 단칸방, 매일 밤 방바닥에 깔고 아침이면 걷어야 하는 이부자리, 궁핍한 살림살이 등을 둘러보게 된다. 마치 연상 게임을 하는 것처럼 하나의 사건이 다른 사건으로 이어지고 하나의 순간이 그와는 확연히 다르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앞 순간과 연결된 또 다른 순간에 맞닿는다. 작가는 과거를 소중히 간직하면서 그 속에 살던 사람들, 그를 돌보아준 사람들, 그를 동반해 준 사람들, 그를 가르쳐 준 사람들, 그리고 때로는 그를 불편하게 했던 사람들마저 애틋한 시선으로 회상한다.
단순하고 소박한 그의 서사가 이 산문시의 핵심이다. 그는 엄청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일상적이며 평범한 이야기가 그의 맑고 투명한 언급의 중심축을 이룬다. 독자들 가운데 그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책장을 하나하나 넘겨 갈 때마다 자신이 겪었던 친밀한 순간을 끊임없이 만나게 될 것이다.
<작가정보>
조재선
1972년 서울 출생. 오랫동안 번역 작업을 했고 시와 산문을 쓴다. 『성심수녀회 역사』, 『발명이야기』, 『시몬 볼리바르』, 『라쉬의 작은 꽃들』, 『삶을 살리는 교육』, 『헬스케어 영성』의 역자이며 , 『마음 둔 곳』이라는 시집을 냈다.
<작가의 말>
사람은 비밀이 된다
사람은 살면서 책이 된다
찾아가기 힘든 無名의 골목 어귀
세상을 잊은 고요한 도서관
그 깊고 깊은 서가에 꽂힌
표제 없는 책이 된다
사람은 살면서 그림이 된다
어린 시절 입은 상처가
누런 송아지 커다란 눈망울에 비치고
청춘의 꿈이 팽팽한 실오라기 한 줄
그 인력에 갇힌 가오리연으로 펄럭대는
까닭을 짐작 못 할 난해한 그림이 된다
사람은 살면서 숲이 된다
그 누구도 닿을 수 없는 사연
단단한 껍질 속 열매에 담아
높디높은 나뭇가지에 매단 나무들이 된다
이름이 없어 아무도 알지 못하고
지도에 없어 가닿을 수 없는 산골짜기가 된다
사람이 살다가 죽으면
자기도 미처 알아채지 못한
수많은 아름다움을 숨긴 채
새벽녘마다 성글게 내려와
고단한 들판 덮어줄 흰 안개가 된다
<목차>
│1 부│
이부자리 009
텔레비전 019
목욕 029
번데기 039
아이스크림 047
태피스트리 054
물고기 060
담배 067
│2 부│
개천 075
풍경 081
버스 090
아파트 103
자전거 109
상상 115
스카우트 121
꽃과 사람 127
│3 부│
카펜터스 137
운전 144
커피 자판기 153
목소리 161
전자오락실 166
동지를 위하여 174
거제도 179
영어 공부 189
│4 부│
설 199
이름 206
주일 213
책 파는 사람 220
말과 뜻 227
선생님 댁 234
사촌 누나 245
시골 252
추천의 글 259
작가의 말262
<책 속으로>
수도원 숙소에는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없었다. 작은 침대, 책꽂이, 서랍 없는 책상, 나무로 짠 의자가 다였다. 책상 위에는 성경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펼쳐 보기는 했지만, 읽지는 않았다. 책이라기보다는 거룩함의 징표로 여겨졌다. 다른 읽을거리는 없었다. 생활이 단순해지자 생각이 단순해졌고 생각이 줄자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이부자리」에서
동국 전파사라는 전파사는 원래는 ‘동국’이라는 아들을 둔 아저씨가 하던 가게였다. 전파사 아저씨도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상호를 바꾸지 않고 전파사를 운영한다. 동국 전파사지만 동국이네 가게는 아니다. 그나마 전파사 이름이 바뀌지 않아서 좋다. 모든 게 바뀔 때 하나라도 바뀌지 않아서 다행이다. 새 주인이 전파사 앞에 앉아 있으면 마치 동국 전파사 옛 사장님이 앉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풍경」에서
도시 구석구석에 여전히 커피 자판기가 남아 있다. 하지만 호주머니에는 조촐한 동전이 없다. 무엇보다 작은 것에 기뻐하는 소박한 취향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인스타 감성이 물씬 풍기는 카페에 가야 할 것만 같다. 스타벅스는 기본이고 케냐, 에티오피아, 파나마 게이샤 같은 풍미 넘치는 원두를 바리스타가 직접 손으로 내려 주는 집에 가야 뭔가 제대로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커피 자판기 앞에 하염없이 서서 아무렇지도 않게 무슨 이야기든 나눌 수 있는 옛사람들이 그리운 밤이다.
-「커피 자판기」에서
한번은 외갓집 소를 몰고 풀을 먹이러 나갔는데 소나기가 거세게 내렸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논은 그야말로 (그때까지 바다를 본 적이 없었지만) 초록빛 바다가 되어 넘실거렸다. 조규찬의 「무지개」라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날 봤던 초록빛 벼들의 물결이 떠오른다. 비가 내리자, 소가 말을 듣지 않았다. 고삐를 당겨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막내 이모가 와서 고삐를 세차게 당기니 그제야 움직였다. 이모는 소를 몰고, 나는 빈 지게를 진 채 비를 맞으며 외갓집으로 돌아왔다. 시골에서 혼자 살림하며 농사일도 하고 외할아버지와 외삼촌 밥을 차려 주는 막내 이모는 못하는 일이 없는 사람 같았다.
-「시골」에서
<서지 정보>
도서명 우리가 고아가 아니었을 때
지은이 조재선
출간일 2024년 11월 7일
판형 134*200
제본 종이책 〔무선제본〕
페이지 264
가격 15,000원
ISBN 979-11-976820-6-3
분야 시 국내 도서>문학>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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