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역사를 이렇게 넓고 깊게, 이처럼 다층적인 시각으로 서술한 책은 한국은 물론이고 저자 자신이 공부한, 영화를 발명했던 프랑스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김성태의 『영화의 역사』는 감히 기념비적인 역작이라고 할 만하다. 마침내 우리는 영화를 이해하고 사유하기 위해 서가 한쪽에 꽂아두고 언제나 찾아볼 수 있는 영화 관련 참고서를 한 권 얻게 되었다.”
_이창동 (영화감독)
의미이기 전에 현상이었고 예술이기 전에 상품이며 이야기 이전에 세상을 담았던 영화의 ‘첫 번째 발자국’ 19C~1927
19세기 말, 영화가 나타나는 시기부터 유성영화가 등장하던 1927년까지의 영화의 역사를 다룬다. 세계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던 때, 영화가 태어날 수 있던 조건들을 역사적 배경과 지적, 예술적 흐름, 과학 문명의 발달을 통해 살펴보고 유성영화가 등장하기 전까지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다룬다. 그렇다고 오랜 과거, 무성영화 시대에 대한 역사적 조망은 결코 아니다. 당시 인류에게 영화는 무성이었다. 오히려 소리가 덧붙여진 영화를 유성영화로 따로 구분했다. 그러니까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무성영화의 역사가 아니라, 인류에게 나타난 ‘영화’라는 도구의 정체이다. 1920년대 첫 번째 전성기를 맞이한 ‘영화’의 삶을 추적하며 인류에게 개념으로 확립된 ‘영화’, 오늘날 영화의 개념과 다르지 않은 ‘영화’를 캐는 작업이다. 이는 현재 우리가 보고 즐기는 ‘영화’의 의미를 진지하게 찾아보는 탐색일 것이다.
한국 영화학자가 새롭게 쓴 세계영화사
영화학자 김성태가 새롭게 쓴 세계영화사 <영화의 역사>는 영화의 역사적 사실만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영화사를 뒤집어 새롭게 읽어내며 영화에 대한 시선을 확장하고. 기존의 영화사가 왜 그렇게 쓰여야 했는지를 이해함으로써 자신만의 영화사를 구축해나가도록 돕는다.
이제까지 영화사는 새로운 매체에 관심을 지닌 지식인들의 관점에서 쓴 영화사, 유럽의 영화를 사유의 영화라는 기준에서 사조 중심으로 기술하거나, 할리우드를 산업과 상업적인 기준에 따라 기술한다. 예술적 고민의 흔적을 찾아내 그에 충실한 영화미학을 입증하거나 혹은 상업적 성공 안에서 자신의 ‘스타일’을 갖춘 감독과 작품을 골라내어 평가한다. 어디를 봐도 '영화'의 특수성은 언급되지 않는다. 대부분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들로 채운다. 지금까지의 영화사는 잘 만든 영화의 기록들이었다.
이런 시선이 오늘날 예술영화와 상업영화를 가르는 터무니없는 미적 기준을 낳았고, 현대 영화산업의 기형적 성장을 초래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예술로서의 영화를 주장하는 쪽과 거대한 산업적 효과를 노리는 쪽의 은근한 대립, 바로 우리 대중들의 의식 속의 기묘한 갈등이 그것의 결과라 하겠다.
‘영화’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을 스크린 위에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출발했다. 영화는 상상해야만 이미지로 떠오르는 세계, 상상해야만 움직이는 세계가 아니라, 눈앞에서 움직이고 살아 있는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새롭게 쓰는 영화사는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다’를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이해하고 더 ‘잘’ 보게 하는 근거들을 살펴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운동과 시간을 눈앞으로 당겨온 역사
영화는 에디슨과 뤼미에르 형제의 발명품이었고, 대중에게는 호기심이자 신종 사업 아이템이었다. 또한 1차 세계대전 전후의 새로운 시장과 산업이었고 할리우드라는 신대륙을 탄생시켰으며, 단순한 출연자를 연기자나 스타로 만드는가 하면, 제작 노동자이던 감독을 예술가와 창작자로 변모시키거나, 독립 제작사들의 경쟁을 촉발하고, 다양한 일자리와 체제를 창출하며 세계 굴지의 거대한 기업들을 일으켰다. 베르그송과 들뢰즈 등의 철학자들에게는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었으며, 그 자체가 자본이자, 종교였으며, 여러 갈래의 사조가 되어 오늘에 이르러서는 산업과 예술의 영역 안에서 학문이 되었다. 이처럼 영화는 모든 시대의 다채로운 의미였다. 이 복잡다단한 과정 안에 대체 얼마나 놀라운 뒷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영화의 역사’라고 하면, 영화가 처음 발명되던 1895년에서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보다 선행해야 할 것은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인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제일 먼저 영화로 만든 서사, ‘이야기’를 먼저 꺼내 들기 일쑤다. 하지만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발명하여 선보인 것이 과연 ‘이야기’일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태어나는 인간처럼, 영화도 탄생할 때 ‘이야기’를 입고 태어나지 않았다. 당시 뤼미에르가 준비한 상영회는 마치 우리가 실수로 휴대전화 카메라의 녹화 버튼을 눌러 기록된 아무 의미 없는 10초짜리 영상 따위였다. 자, 그때의 영화가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에서 어떻게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영화가 나타나게 되었을까?
그날, 뤼미에르의 상영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야기’를 감상한 것이 아니다. 당시 사람들은 스크린에 비친 무의미한 움직임을 보았다. 시간과 운동이 기계로 인해 되돌려지고 눈앞에서 재구현되는 기상천외한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여기에 서사는 없었다. 이것이 바로 초기의 영화다. 이날은 운동과 시간을 다룬 최초의 사건이자, 인체의 시지각 작용을 구현한 과학기술로서의 영화가 발명된 날로 인류사에 기록된다. 그 뒤로 오랫동안, 사람들은 그저 이 의미 없는 움직임을 보기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했다.
‘움직임’을 재현함으로써, 영화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눈앞의 ‘현상’을 인류에 들이민다. ‘현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영화를 즐기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개념이다. 저자는 서사를 걷어낸 자리에 바로 ‘현상’이 있음을 똑똑히 보여주고자 한다. 저자는 철학자 베르그송과 들뢰즈의 사유를 관통하는 물질과 시간, 움직임의 의미들을 영화를 통해 설명하고, 기술의 혜택에 익숙해져 놓치고 있던 21세기의 우리에게 ‘현상’의 낯섦을 일깨워 영화의 실체를 드러낸다.
한편, 오락물이자 상품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대중의 관심과 돈의 흐름에 크게 좌우되어, 문화나 예술로 인정받지 못한 채 줄곧 서커스의 묘기처럼 소비되었던 것 역시 영화였다. 그러나 영화는, 그 끈질긴 생명력과 변화에 대한 갈망으로 점차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기 시작한다. 유럽과 신대륙을 넘나들며 편집과 미장센, ‘이야기’를 시도하고, 배우와 감독, 장르와 스타일, 사조를 탄생시키는 것은 물론, ‘할리우드‘라는 제국과 굴지의 기업들을 일으키며 거대한 산업으로 성장한다.
영화의 정의, 그리고 움직임과 현상
Movie, Cinema, Film. 우리가 누구나 ‘영화’라고 해석하는 단어다. 하지만 한 단어로 설명하기에 영화는 제법 많은 정의를 가졌다. 1894년,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 구현해 낸 짧은 ‘움직임’도 영화고, 제작자들이 다루던 필름도 영화며, 서사를 가진 하나하나의 작품들도 다 영화다. 이제껏 이 의미들을 ‘영화’라는 한 단어에 뭉뚱그려 사용해 온 것이다. 영화의 개념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말에 영화가 가진 이 두 가지 개념을 구분할 단어가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영화라는 한 단어로 두 개념을 통칭하면서 모든 관심을 영화 속 ‘이야기’에만 쏟는다. 서점의 영화 코너는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 책들로 가득하고, 심지어 영화 서적과 영화들을 예술로 분류한다. ‘영화 속 이야기’라는 문장을 뒤집으면 ‘이야기 바깥에 영화’가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 ‘영화’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는 에디슨과 뤼미에르 영화의 차이점도, 둘 중 뤼미에르만 영화의 발명가로 인정받는 것도, 에디슨이 어떤 인물이며 어떻게 몰락했는지도 모른다. 극장이 어떻게 탄생하고 발전하여 지금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고, 영화의 중심지가 프랑스가 아닌 미국인 까닭도, 영화가 개척기 신대륙의 땅을 밟고 동부에서 서부로 간 이유도 모른다. 도대체 ‘할리우드’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당시의 제작, 배급은 어떤 구조였을까? 감독과 배우라는 직업은 또 어떻게 생겨났을까? 영화가 천덕꾸러기 한량의 문화였다고? 유럽의 영화는 모르지만, 할리우드 영화의 팬이라고? 어원으로 보면 ‘움직임’ 자체이자 매체의 일종이지만, 이 시대의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매체로 만든 ‘이야기’를 영화로 정의하는 경향이 크다. 그런데 영화의 의미가 다르다면, 당연히 영화의 역사도 의미에 따라 다르게 기록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영화사나 영화 서적들은 미학과 연출을 중심으로 작품의 서사를 해석하고 연대별로 분류하는 것에 치우쳐 있다. 이 책은 ‘움직임’에서 역사를 다시 시작한다. 영화의 역사란 곧 영화의 특수성의 역사다. 최초의 ‘영화’는 분명히 기계나, 상품이나, ‘이야기’가 아니라, '움직이는 이미지’였다는 것. 영화들은 모두 ‘움직이는 이미지’를 만드는 ‘영화(시네마)’라는 형식에 의해 만들어진 생산품 아니던가? 기계가 재현한 움직임이자 현상이었고, 현상에 덧대어진 서사였으며, 언제나 생존을 걱정했던 하나의 기술이자 상품으로서의 영화. 역사란 바로 그‘시네마’의 역사, 인간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온 ‘영화’의 삶을 다루어야 한다. 영화들을 생산하는 양식, 19세기 이후에 인간에게 나타난 표현 양식으로써의 '시네마(영화)'의 역사를 다룬다는 것은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어떤 영화들이 나왔으며 또한 그것들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사고가 왜 출현했는지를 추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편의 영화가 그 시대에 지니는 의미, 단지 영화적 의미만이 아니라 일반 역사적 관점에서의 사회적 의미를 다루면서 ‘어떤 영화들’을 보게 하는 게 아니라 ‘영화’라는 표현 양식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화사에서 언제나 미학 뒤에 감춰져 있던 과학과 철학, 돈과 산업, 시장과 노동자를 영화의 역사에 당당히 불러낸다.
발명되어 예술을 쟁취한 기술, 영화
영화의 역사는 실제로도 미학을 앞세울 만큼 고상하지 않다. 초기의 영화란 한낱 단순한 기계 생산물로서 예술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고, 굳이 용도를 찾는다면 한량과 지친 서민들을 위로하는 심심풀이 오락물에 가까웠으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돈을 따라 움직여 온 ‘상품’이었다. 영화에게 있어 예술은, 산업화 시기 유럽과 개척기의 신대륙,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필사의 노력으로 세상을 장악하며 쟁취한 하나의 결과물이었지 근원이나 본질이 될 순 없다. 저자는 이러한 사실을 주지하고, 기존의 영화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영화의 역사를 서술한다.
예술이었다면 소멸이나 도태를 걱정할 필요도 없겠지만, 영화는 기술이었기에 자본 시장에서 생존을 위한 경쟁을 피할 수 없었다. 돈은 신대륙 개척과 1차 세계대전을 따라 흘렀고, 영화의 운명에 많은 것을 결정했다. 영화산업의 시스템, 영화 지형과 제작 환경을 바꿨고, 상영과 관람의 방식을 바꿨으며, 수많은 제작자와 제작사를 배출해 냈다. 영화가 상품이었듯이, 오늘날 우리가 일종의 예술인으로 여기는 감독과 배우도 당시에는 단순한 노동자였다. 이들은 전쟁과 자본이 만든 생태계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연출과 편집, 스타일과 장르를 시도했다. 이로써 대륙 간 영화의 성질이 구분되었고, 같은 대륙 내에서도 곳곳에서 저마다 다른 시기, 다양한 영화들이 탄생해 사조를 이뤘다. 이렇듯 영화가 각각의 고유성을 지니고 창작물로 변모해 가는 동안, 영화산업의 노동자들도 자연스레 오늘날 우러러보는 창작가와 연기자로 자리 잡는다.
기술과 철학, 자본과 미학의 관점에서 다시 쓴 세계영화사
영화사가 다시 쓰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우리가 흔히 일컫는 미학, 작품으로서의 영화는, 적어도 이 영화사에서는 첫 페이지가 될 수 없다. 이제 영화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져야 한다. 왜 ‘영화’를 언제나 필름들로 이해해야만 하나? 그것은 오히려 ‘영화’를 편협하게 이해하는 것 아닐까? 저자는 또, ‘예술 그림’, ‘예술 글’, ‘예술 음악’이라는 우스꽝스러운 호칭이 영화에서는 유독 ‘예술영화’라는 자연스러운 합성어로 대중에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영화와 예술을 동일선상에 놓는 데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림이나 글, 음악이 기계로 구현될지언정 기계였던 적은 없는 데 반해, 영화는 탄생의 순간부터 이 순간까지 기술이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기술일 것이다. 기계가 역사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유다. 에디슨과 뤼미에르의 기계가 달랐고, 유성영화가 역사에 한 획을 그었으며, 흑백영화가 색을 입었다. 그래픽이 영화를 만드는 오늘처럼, 기술을 빼놓고 영화를 말할 수는 없다. 엄밀한 시각에서 1897년 발명된 기계로부터 1927년 첫 유성영화의 탄생까지, 영화사의 초기를 세계사의 흐름에 맞춰 기술과 철학, 자본과 미학의 관점에서 다시 써냈다.
역사는 결과를 알고 보는 이야기라고들 한다. 이러한 초기 영화의 역사를 돌아볼 때, 오늘날 영화와 영화산업, 영화인들이 예술의 범주에서 분류되고 현대인의 교양으로 공고히 자리 잡아 문화를 이끌고 있다는 점은 어떻든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영화는 지금도 예술과 비예술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들고 있지만, 어떤 형태로든 일종의 새로운 예술이 되었다는 사실 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책을 읽은 후 ‘영화’를 향한 왠지 모를 인간적인 감정이 일어난다면, 그건 아마도 지금껏 영화가 살아낸 불굴의 세월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삶에 귀를 기울이다
영화를 안다고 자부하면서도 영화에 대해 제대로 논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영화의 개념을 정리한 적도 없으며, 영화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지금까지 영화의 제목만 연대별로 나열한 책만 읽어 왔다면 이제 ‘영화로 만든 이야기’가 아닌, ‘영화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다.
십여 년 이상 프랑스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연구한 김성태 박사가 여기 이 <영화의 역사>에 그동안 연구하며 수집했던 자신의 방대한 자료와 지식을 풀어놓는다. 이 책을 통해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영화’를 더 사랑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친근한 어투로 조곤조곤 부추긴다. 덕분에 이 책의 문장은 저자의 육성을 그대로 품게 되었다. 글에 녹아있는 특유의 화법과 목소리는 그의 제자였다면 단박에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생생하다. 평생을 배우고 가르쳐 온 긴긴 시간만큼이나 영화를 대하는 저자 고유의 감성과 남다른 애정을 책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영화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저자는 또 다른 시대의, 또 다른 영화의 생, 영화의 역사 두 번째 발자국을 준비 중이다.
<추천의 글>
“1998년, 나는 비 오는 파리의 어느 카페에서 영화를 공부하는 한 한국인 청년을 우연히 만났고, 영화를 학문적으로 탐구하고자 하는 그의 남다른 열정과 포부에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그리고 그 열정과 꿈이 드디어 25년이라는 시간의 각고를 거쳐 <영화의 역사>라는 역작으로 탄생했음을 확인하는 것은 참으로 감동적인 일이다.
이 책은 단순히 영화의 역사를 기술한 책이 아니다. 시네마토그래프라는 운동과 시간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발명품이 소리와 색채를 얻고 자본과 결합하여 리바이어던 같은 거대산업이 되기까지, 노동과 기술의 결합이면서 동시에 창작자의 생산품이 무한복제의 수익상품, 심지어 신식민지화의 대표상품이 되기까지, 렌즈를 통과한 빛이 만들어내는 현상이 삶과 세상을 읽는 철학이 되고 예술이 되고 가장 강력하게 대중을 사로잡는 이야기의 매체가 되기까지, 그 다채로운 영화의 정체성을 해부하고 복잡한 진화의 과정을 밝히고 있는 책이다.
영화의 역사를 이렇게 넓고 깊게, 이처럼 다층적인 시각으로 서술한 책은 한국은 물론이고 저자 자신이 공부한, 영화를 발명했던 프랑스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김성태의 『영화의 역사』는 감히 기념비적인 역작이라고 할 만하다. 마침내 우리는 영화를 이해하고 사유하기 위해 서가 한쪽에 꽂아두고 언제나 찾아볼 수 있는 영화 관련 참고서를 한 권 얻게 되었다._이창동 (영화감독)
“영화의 역사를 현미경처럼 살펴보는 이 책은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과 일반 독자 모두를 위한 책이다.”_김원국 (하이브미디어코프 대표 <서울의 봄> <남산의 부장들> 제작)
“영화 감독으로서 여전히 영화는 내게 하나의 질문이다. 벽에 부딪힐 때마다 언제나 기본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영화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영화창작의 초심을 다시 일깨우고 있다.”_ 장훈 (영화감독)
<저자소개>
김성태
영화학자. 프랑스 파리 3대학 영화학과 박사. 12년간 대학원부터 박사 과정까지 리용 2대학과 파리 3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자크 오몽 교수의 지도하에 장-뤽 고다르 연구(Le Cinema de JEAN-LUC GODARD, 1999)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씨네21, 필름2.0 등에 글을 쓰고, KBS 미디어를 통해 다수의 프랑스 영화를 번역했다. 지금까지 중앙대, 한예종, 서강대 영상대학원 등에서 학생들과 만났고 현재 성균관대에 출강하고 있다.
영화 연구뿐 아니라 영화 <상류사회>, <이리>, <검은 갈매기>의 시나리오를 썼으며, <천문>의 시나리오 각색, <서울의 봄> 원안 작업에 참여하며 창작활동 또한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세계영화사 강의』(공저, 연세대 출판부, 2001), 『필름 컬쳐 5(알랭 레네)』(공저, 한나래, 1999), 『네 정신에 새로운 창을 열어라』(공저, 민음사, 2002), 『영화-존재의 이해를 위하여』(은행나무, 2003 / 전자책, 불란서책방, 2023) 등이 있다.
<저자의 말>
결국, 프랑스에서 영화를 공부하며 깨달은 것은 서구가 사고하는 방식, 행동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12년을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왔고 20여 년을 강단에 서고 말을 했고 글을 썼다. 그러다 깨달았다. 잘못하면 우리는 서구의 지식을 해석하고 그에 대해 말하는 꾀꼬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지식을 습득하고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세상에 관한 생각을 지니려고 시작한 것이지 그들의 지식을 해석하는 데 급급해하려고 시작한 게 아니었다. 지식을 습득하는 이유는 지혜롭게 살려는 목적 외에 이렇다 할 목적이 없다. 이제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본다고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영화사를 그저 읽고 메모하고 외우는 게 아니라 생각하고 판단하고 새로 인식하는 것. 남들의 학문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우리가 얻은 것들로 우리의 말을 하는 것. 푸코 전문가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게 아니라 내가 세상을 사유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처럼.
<목차>
추천사_이창동(영화감독)
‘영화’의 시간 앞에서— 들어가며
1부 움직이는 세상, 움직이는 이미지
1. 움직임
달리고 있는 남자
2. ‘근대’와 세계
역사를 ‘만들기 위한’ 의욕 | 과학적 연구
철학과 과학의 역전되는 위상 | 현상의 재정의와 그것을 기록하는 도구의 탄생
3. 기계와 ‘영화’
기계에서 ‘시네마토그래피’로 | 베르그송의 발견, 가짜 움직임 | ‘영화’의 진짜 가치
4. 영화의 죽음, 1897년
미국에서의 ‘영화’ | 제페토의 실패한 꿈
5. 에디슨 1887~1900년대 초
‘최초’를 놓친 발명가 | 천박한 영화, 위대한 사실의 조각들
6. 5센트의 향연, 니켈로디언, 1905~1910
영화의 질료, show | 미국영화의 시작 : 니켈로디언
7. 전환기의 유럽과 미국, 1905~1915
필름 다르, 허구로의 항해 | 산업의 형성, 트러스트 | 할리우드 이주
8. 국가의 탄생, 1910s
할리우드 클래식의 시작 | 편집의 탄생 | 그리피스
9. 달리기—키튼, 채플린, 이상한 영혼, 1910s~
채플린과 키튼 | 움직이는 방법의 탄생, 슬랩스틱
10. 스펙터클—할리우드로 넘어가기 전에, 1910s~1차 세계대전 전
‘스펙터클’의 새로운 의미 | 굶주린 시선 Regard affamé
2부 ‘영화’의 시대
11. 보이지 않는 것들, 발견의 시대, 1910s
1910년대의 재정의 | 북유럽 영화 | 월스트리트가 움직이다
12. 흑백, 무성—의미의 담지자
할리우드 시대의 개막 | 이데올로기
13. ‘영화’의 힘에 대한 자각, 1910s를 넘어서
이제까지 없던 것들의 출현 | 영화관의 의미 | 새로운 환경, 새로운 시대, 1910s & 1920s
14. 뱀파이어의 탄생, 1920s
1992년의 드라큘라 백작 | 1896년의 만남
15. 생산의 시스템—장르, 1914~1920s
제작 시스템의 구축 | 새로운 개념의 출현
16. ‘영화’의 이야기들
메이저의 등장 | 이야기의 제국이 되어간 할리우드
17. 무성영화, ‘다른 눈’과 ‘새로운 눈’의 시대
이미지로 들리고, 보이는 세상
18. 새로운 의식, 인지, 그리고 사조들
19. ‘탐욕(Greed)’에 대하여
미장센 | 자본이 결정하는 영화 | 프로듀서, 영화의 주인
20. 요소들—할리우드를 구성할
스타들 | 세계시장
21. Drama 이전
신흥종교 | 천박한 ‘소리’의 등장
22. ‘영화’의 시대—1권을 마치며
• 참고문헌
• 부록—영화적 시도들, 그리고 영화들 1892-1927
<책속에서>
P. 72
사람들은 이처럼 비로소 ‘움직임’에 대한 베일을 벗겨보고자 했다. ‘움직임’에 대한 관심, 그리고 그를 포착하려는 욕망이 나타났음을 보여주는데, 이 욕망이 과학과 철학의 양편에서 실체들을 얻어가는 가운데 나온 것이 ‘영화’이다.
P. 73
이 ‘영화’는 단면을 뭉개버린 대신, ‘움직임’을 (다시) 보게 해주었다. 영화는 세상을 기록했고 사람들은 기록된 세상을 봤다. 즉, 지나가 버릴 수밖에 없었던 세상을 다시, 그것이 있었던 그대로 보게 한 것이다. 움직임을 다시 볼 수 있는 장치(지나간 시간을 다시 볼 수 있는 장치)가 출현했다!사진이 움직임의 이해로 인류를 이끌었다면, 결국 영화는 움직임의 결과에 대한 해석, 분해로 인류를 이끈다. 재생되는 움직임을 손에 넣음으로써 움직임의 재구성이 가능해지게 된 셈이다. ‘영화’가 이야기를 시작하며 비로소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영화다움’이 구현된 것이 아니다. ‘영화’가 ‘세상’을 손에 넣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야기’가 가능해졌다. ‘세상’을 우리가 상상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재구성할 수 있기에, ‘움직임’을 재구성함으로써 허구인 이야기가 버젓한 ‘세상의 탈’을 쓰고 드러나기에…
P. 150
베르그송은 가차 없이 ‘영화’의 단점을 애써 파고들어 그것을 한갓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 ‘가짜’로 만들어 버렸다. 프로이트는 단지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호기심에 그쳤고, 고리끼는 심지어 사악한 악마의 장치처럼 말하기도 했다. (…) ‘어제 나는 그림자의 왕국에 있었다. 아, 만약 내가 당신에게 그 세계의 기이함을 보여줄 수 있다면. 색도 소리도 없는 세계. 모든 것―땅이나, 물, 공기, 나무들, 사람들―이 그저 회색으로만 나타나는. (…)거기엔 삶이 없다. 단지 삶의 그림자만 있었다. 삶의 활기는 사라져 버린, 일종의 소리 없는 망령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들만 있었다. (…)이 그림자들의 움직임은 보기에도 끔찍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이 오직 그림자들, 망령들, 유령들뿐이었다. 나는 전설을 생각했다. 어떤 악한 존재가 마법을 걸어 마을 전체를 끝없는 잠으로 몰아넣었다던. 나는 마치 마법사 멀린이 우리 앞에서 그의 주술을 걸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 뤼미에르 영화를 본 뒤, 막심 고리끼의 일기 중에서.
P. 222
할리우드는 그렇게 대중의 시대를 열었고, 대중들의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가 대중예술이라고? 어떤 의미에서? 대중들에 영합하는? 그들이 보는 예술이라고? 천만에…. 영화가 대중예술인 이유는 이처럼 생산자와 소비자가 같으며 그들이 특정한 계급적 관계에 놓이지 않으며 함께 동일한 상태에서 만들어 간, 이들이 대중이라 불렸기에 그리된, 대중예술이다. 대중들의 시대에 그 안에서 나타난 예술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고급 예술’에 대응하는 개념, 대중들을 위한 것이라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대중들을 ‘위한’ 것은 사실 하나도 없다. 사실상 ‘대중’이 누구인지도 불명확하며, 곧 자신들이 ‘대중’이기도 한 생산자들이 소비자 대중을 위해 움직인다는 개념도 어불성설이다).
P. 357
오늘날 영화를 말할 때 유행처럼 따라붙는, 지겨우리만치 반복되는 용어가 영화미학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 용어는 조심스럽게 검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실 이 경험은 전혀 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미에 대한 경험은 이런 ‘몰아’가 아니며, 현실적인 감각 기제의 반향도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이 19세기 말의 ‘미’에 대한 개념을 그토록 고수하고 있는 한 말이다.
P. 358
나는 결코 영화들을 설명하기 위해, 어떤 영화가 뛰어나고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를 말하기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 영화들을 구별하고, 그로부터 ‘영화’의 특수성을 끄집어내는 일이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볼까? 집에서 나와, 검은 동굴로 걸어 들어가 그 안에서 ‘이야기들’을 경험하고는 다시 자연의 빛 아래 서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 이 ‘이야기’를 말하는 중이다. 우리 모두 ‘앨리스’가 된 ‘이야기’를!
P. 452
‘영화’는 이야기를 짜내는 방직기계가 아니다. ‘이야기’를 ‘이미지’로, ‘현상’으로 치환하는 공작기계이다. 이 상태의 옷을 입고 이들을 보면, 따라서 더 이상 ‘도식’의 문제는 끼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 그들이 지닌 묵직한 의미들을 보게 될 것이다.
<서지 정보>
제목 : 영화의 역사
부제 : 운동과 시간을 눈앞으로 당겨온 역사 ‘첫 번째 발자국’ 19C~1927
저자 : 김성태
출간일: 2024년 1월 15일
발행처: 불란서책방
쪽수: 540쪽
판형: 148mm*210mm
ISBN: 979-11-971456-7-4 (03680)
정가: 29,800원
분야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영화/드라마 > 영화이론/비평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의 이해 > 미학/예술이론
국내도서 > 인문 > 문화/문화이론/문화사
국내도서 > 역사 > 테마로 보는 역사 > 문명/문화사
'다시서점 > 입고소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르지 않는 마음 - 일요편지모음 / 캐롤 (0) | 2024.11.14 |
---|---|
사라진 조각들 / 박상은 (1) | 2024.11.14 |
나는 서툰 계절에도 피어난다 / 새벽감성 (1) | 2024.11.14 |
이별 후에 시작되는 사랑이 있어요 - 슬프고 야하고 다정한 (개정증보판), 슝슝 (0) | 2024.11.14 |
퇴근이 취미입니다 / MOOn Bro (7) | 2024.11.13 |